7개월 전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더라.

글쓰기 모임에서 “어디갔어 버나뎃”을 보고 남기는 글.

버나뎃은 뉴욕 건축계의 라이징 스타였다. 그를 위한 다큐까지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일을 겪은 후 건축계에서 돌연 사라지며, 남편과 함께 시에틀로 이주한다. 그는 딸을 낳고 시에틀에 주거하지만 시에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곳의 사람이며, 그곳의 건축물이며, 그곳의 지역주의는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다. 버나뎃은 스트레스로 인해 여러가지 증세들이 있는데 그 증세들이 본의아니게 여러가지 사고를 일으킨다. 결국 남편은 그러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정신의학 전문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사람들이랑 여러가지 생각들을 나누었는데 공통적인 부분이 버나뎃의 능력을 부러워한단 부분이었다. 영화에 묘사되는 버나뎃은 오랜 시간 현업에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같이 일한 동료가 능력을 인정해주며 일을 부추기며, 또 작은 틈새에서 기회를 만들고 담대한 도전을 하며 멋지게 다시 꿈꾸던 건축계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버나뎃은 언제나 자신을 믿고 성공할 것을 아는 사람이다”

“버나뎃은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약이 필요가 없었던 사람인 것 아닐까?”

요런 말들이 오갔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 문장은 아닐거다. 하지만 톤은 비슷했다.

대부분 나랑은 생각이 반대여서 신기했다. 내 생각은 결과에 과정이 변색된 케이스가 아닐까? 만약 결과가 실패였다면 버나뎃은 어떤 사람인 것인가?

버나뎃은 다년간 주의를 기울인 건물이 다른 사람의 손에 철거당하며 그 충격에 남편과 함께 시에틀로 이주하며 건축계에서 도망친다. 시에틀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맘에 들지 않고 마침 아이가 태어나 건축이 아닌 아이에게 모든 주의를 쏟는다. 그녀는 쌓여져가는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다양한 편집증 증세를 보이는데, 남편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버나뎃에게 여러가지 정서적인 폭력을 저지른다.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하며 버나뎃은 도망치고 도망친 남극에서 버나뎃은 힘을 얻어 자신이 하던 일들을 다시 시작한다.

버나뎃은 아주 자그마한 구석으로 자신을 믿고 있었을까? 그 작은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 버나뎃의 가족 중 버나뎃을 이해하는 사람은 딸인 비밖에 없다. 남편은 버나뎃을 예전 모습으로 돌리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버나뎃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버나뎃은 남극으로 도망치며 어떤 계획도 없었다. 그저 남편의 폭력에 도망친 것일 뿐이었다. 달라진 환경, 공간에서 그는 다시 영감을 받고 좋아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기회를 잡기 위해 다소 위법적인 것들이더라도 개의치 않고 행동한다. 그는 저지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버나뎃을 보며 엄마가 참 많이 떠올랐다. 둘 다 적지않은 반사회성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인들은 그 반사회성을 배려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두 사람은 자신의 개성을 죽여야 했고 가족마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가족들은 약과 상담을 하라며 다그쳤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뢰자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약과 상담을 시작하는 것 마저 용기이며 도전이라는 것을. 버나뎃은 그저 도망쳤을 뿐이다. 달라진 환경과 사람들은 그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엄마를 참 많이 닮았다.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 그리고 약간의 반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 그리고 엄청나게 잘 저지른다는 것도. 일을 하지 않으면 쉽게 우울에 젖어드는 것도.

아무튼 감상에서 벗어나서 한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꾸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자신만이 잘못된 사람이 되었을 때, 서서히 숨이 조여올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그 공간에서 그 환경에서 도피할 필요성이 있다.